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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story

[Jaguar] 서민을 위한 영국 전통의 럭셔리로 태어나다


산업혁명의 나라 ‘영국’. 영국은 독일과 더불어 자동차역사의 한축으로 기록되고 있다. 독일이 보급형 차량의 대중화를 선도했으며, 영국은 럭셔리 자동차메이커의 종주국으로 불릴 정도로 럭셔리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중 영국 왕실의 공식 의전차량인 재규어는 자동차 역사에 상당히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모터싸이클 사이드카 제작업체에서 시작해 럭셔리 메이커들의 1/3 가격에 고성능의 럭셔리 차량을 선보이면서 영국인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기 때문이다.

영국을 상징하는 차 ‘재규어’. 그 날렵하고 우아한 역사 속으로 들어가 봤다.

▲ 모터싸이클 제작업체, 자동차를 만들다!

재규어는 빌 라이온스와 월리엄 와슬리의 만남에서 시작됐다. 모터싸이클 광이었던 라이온스는 와슬리를 만나 멋진 스타일의 모터싸이클을 만들었고, 이후 1922년 9월 대출금 1000파운드로 블랙펄에 ‘스왈로우 사이드카 컴퍼니’(Swallow sidecar company)를 설립한다.

초라한 건물에서 소수의 직원들과 함께 시작한 모터싸이클 제작사는 이후 영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회사 재규어의 모태가 됐다.

당초 재규어는 스왈로우사이트카란 회사 이름처럼 자동차가 아닌, 모터싸이클 생산업체로 시작했다. 하지만 라이온스가 모터싸이클에 자동차 바디를 얹는 방식의 Austin이란 이름의 베이비카를 선보였고, 이 자동차가 대히트를 치면서 당시 자동차제작사의 요람이었던 미들랜드로 본사를 이전해 재규어를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재규어는 여전히 자동차가 아닌 모터싸이클에 가까운 차를 만드는 업체에 불과했다. 게다가 독자적인 디자인도 갖고 있지 않았다.

결국 재규어의 설립자 라이온스는 고민 끝에 스탠다드자동차회사와 함께 섀시를 제작, 독자적인 모델생산에 나선다.

이렇게 등장한 자동차가 재규어의 첫 번째 자동차로 기억되고 있는 SS시리즈다. 1931년 런던모터쇼에 등장한 SS는 당시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했던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보여줬지만, 가격은 당시 대형차들의 1/3 수준에 불과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 고성능·디자인·가격 ‘삼박자’ 갖춘 SS 등장

SS의 성공 이후 재규어에는 한차례 변화가 찾아온다. 라이온스와 함께 재규어의 시금석을 닦았던 와슬리가 떠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이온스를 와슬리의 빈자리를 실린더 헤드 디자인 전문가였던 웨슬레이크와 엔지니어링 전문가였던 히네스를 발탁해  훌륭하게 메꿔낸다. 특히 히네스는 이후 35년간 재규어의 두차례 성장기를 이끌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두 사람의 엔지니어가 추가된 재규어는 곧바로 SS90을 출시한다. 스타일면에서 상당히 앞섰던 이 스포츠카는 성능의 부족함으로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하지만 엔지니어 전문가들의 활약이 이때부터 시작된다.


1935년 재규어는 SS와는 완전히 다른 세단과 스포츠카를 선보인다. 당시 히네스는 새로운 섀시를 개발했고, 웨슬레이크 역시 엔진출력을 고효율로 높이는 성공하면서 새로운 디자인이 필요했다. 라이온스는 결국 새로운 차체를 주문해 디자인했고, 이 디자인은 당시 재규어보다 6배 이상 비쌌던 벤틀리와 가깝게 나왔다.

새롭게 적용된 기술과 새로운 디자인이 등장하자, 라이온스는 결국 자동차브랜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신모델 SS100은 우아하고 강하면서도 민첩한 동물인 ‘재규어’의 이름을 가져와 채택하게 된다. 신사들의 차로 불리는 재규어가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생산된 재규어 SS100은 이후 한차례 더 개량을 거쳐 완벽한 스포츠카로 거듭나게 된다. 하지만 정작 생산을 앞두고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단 한 대만 생산되는 비운의 스포츠카가 됐다.

▲ 재규어의 심장 ‘XK엔진’, 세상을 놀라게 하다!

전쟁은 재규어 뿐 아니라 영국 전체의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라이온스는 전쟁기간 동안 군용 사이드카 제작에 나섰으면 항공기 산업에도 진출했다. 하지만 병참기지 역할을 했던 공장의 주요 폭격장소가 되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2차 대전이 종전되자 재규어는 수출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당시 수출을 하지 못하면 강철을 공급받지 못했기 때문에 과거 모델을 도입해 미국으로의 수출을 시작한다.

재규어는 일단 스왈로우 사이드카를 의미했던 SS란 브랜드를 버렸다. SS가 2차대전 당시 나치의 친위대를 상징하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재규어만의 단독브랜드가 된 셈이다. 또한 전쟁 이전에 생산됐던 SS100을 LNW 100으로 개명시켰다.

재규어는 1948년 전쟁 이후 첫 번째 임시모델 Mark V를 발표할 준비를 한다. 하지만 CEO였던 라이온즈는 엔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출력을 좀 더 올려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엔지니어들은 이를 해결하기 과감하게 오버헤드 캠 샤프트 시스템을 선택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직렬식 6기통 XK엔진이 된다. 재규어의 날렵함을 상징하는 XK시리즈가 탄생한 것이다.

XK120으로 명명된 이 차량은 당시 202km/h의 속도를 기록, 영국에서 가장 빠른 차량으로 기록됐다. 게다가 998파운드(세금포함 1298파운드)에 불과한 저렴한 가격과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인해 주문이 폭주했다.

이후 1950년 선보인 Mark VII 세단 역시 큰 인기를 끌면서 재규어는 1951년 회사를 카벤트리의 브라운스레인의 공장으로 이전한다.

▲ 왕실부터 서민까지 영국의 국민기업으로 우뚝

재규어는 이후 XK시리즈의 변경모델을 잇따라 발표했고, 계속된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재규어는 스포츠카 제작사가 아닌 자동차제작사였기 때문에 세단의 필요성이 중요해졌다.

1960년 중반 이후 여러 종류의 세단을 공급했지만, 재규어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라이온스는 또 하나의 걸작을 선보이게 된다. 바로 XJ시리즈가 그것이다.

재규어의 정체성을 강력하게 보여주고 있는 이 차량으로 재규어는 다른 세단을 모두 정리하고, XJ시리즈만 생산하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그 판단은 20년동안 흑자를 기록함으로서 훌륭한 결정이었다는 것을 입증했다.

한편 창업자 라이온스경은 재규어의 정체성을 지켜내기 위해 1966년 영국 자동차회사(이후 BL)에 합병시킨다. 이후 1979년에는 국영기업 민영화 정책에 따라 재규어의 상장이 진행됐다.

1984년 런던증시에 상장된 재규어는 정작 일반시민들이 주식취득이 이뤄지면서 ‘가장 영국적인 차’로 인정받았다.

자동차전문가들은 “재규어는 서민형 자동차로 시작했지만, 영국 왕실 의전차량으로 지정될 정도의 발전을 보여준 사례”라며 “가장 고집스러우면서도 가장 혁신적인 모습이 기대되는 브랜드”라고 평가했다.


snikers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