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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story

[MASERATI] 세단처럼 편안해도 페라리보다 빠른 伊 최고 슈퍼카!!


“멋진데, 어디 회사 차지?”

울부짖는 엔진소리와 함께 근육질의 날렵한 바디, 그 가운데 삼지창 모양의 엠블럼이 인상적인 슈퍼카가 있다. 이탈리아 자동차메이커인 마세라티(Maserati)다.


마세라티는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슈퍼카다. 날렵하면서도 강력함이 느껴지는 외관을 갖고 있는 마세라티는 1년에 1만대도 생산되지 않는 희귀한 차량이다. 100% 수작업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100% 수작업으로 생산되는 차량은 벤츠의 마이바흐(독일), BMW그룹의 롤스로이스(영국) 등이 있다. 

스포츠카가 아니면서 스포츠카를 능가하는 성능을 자랑하는 마세라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멋진 고성능 세단 마세라티를 살펴봤다.

- 마세라티 6형제, 경주용 자동차에 빠지다!

마세라티의 첫발은 이탈리아 볼로냐 지방에서 내디뎌졌다. 당초 이 지역 마세라티 가문의 6형제(알피에리 Alfieri, 빈도 Bindo, 에토레 Ettore, 어네스토 Ernesto, 마리오 Mario, 카를로 Carlo)는 경주차와 모터사이클 업계에서 일했는데, 1926년 맏형인 알피에리가 경주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자체적인 자동차 생산에 나섰다.

스파크 플러그(자동차 부품) 제작자였던 알피에리는 당시 이탈리아 토리노의 디아토(Diatto)사를 위한 경주차 개발을 주관하고 있었는데, 디아토사가 문을 닫으면서 이 회사의 직렬 8기통 엔진 디자인을 인수했고, 이를 기반으로 차량을 만들었다.

마세라티는 이후 경주용 장비와 엔진에 대해 연구하면서 명성을 쌓았고, 1930년대에 들어서서는 극소수만을 위한 경주용 자동차 제작에 연구하기 시작했다. 마세라티는 이렇게 생산된 차량에 포세이돈의 삼지창을 본딴 엠블럼을 만들어 차량에 사용했다.

이런 가운데 마세라티에는 큰 시련이 닥쳤다. 1910년 막내동생인 카를로가 사망한 것. 여기에 맏형인 알피에리마저 1932년 경주 도중 사고로 사망했다.

형과 동생의 죽음 이후 마세라티는 1937년 사업가인 아돌포 오르시가 사들인다. 오르시는 회사를 블로냐에서 모데나로 옮기고, 1947년에 이르러서야 최초의 승용차라고 할 수 있는 A6-1500을 공개했다.

마세라티 형제들은 고문 계약이 끝나자, 회사를 떠나 OSCA 스포츠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 월드그랑프리 우승 이후 레이싱대회 불참

마세라티를 인수한 오르시는 당시 유럽 지역 레이싱 대회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던 알파로메오를 눈여겨본다. 정확하게는 알파로메오의 기술설계자였던 콜롬보(Gioacchino Colombo)에게 매력을 느끼고 1953년 그를 스카웃트해 250F 설계에 참여시켰다.

이렇게 탄생한 마세라티 250F는 당시 가장 훌륭한 경주용 차 중 하나로 손꼽힌다. 당시 레이싱 대회를 우승했던 많은 드라이버가 이 차량을 운전했기 때문이다.

특히 레이싱계의 전설로 통하는 후앙 판지오(세계 타이틀 5회 우승)도 1957년 이 차를 통해 세계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실제 마세라티는 현재까지 F1대회를 포함해 총 500회 이상의 레이싱 대회 우승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마세라티는 1957년 이후로 레이싱대회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한다. 여러 명의 드라이버가 사고를 당한 것도 이유였지만, 회사가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60년과 61년, 독일에서 열린 1000km의 레이싱 경주에서 ‘버드케이지’가 우승을 차지해 레이싱대회와의 인연은 이어갔다. 버드케이지는 이후 새로운 버전으로 다시 등장해 사랑을 받고 있다.

- 레이싱 챔피온의 굴욕, 재정난에 팔려다녀

레이싱 대회까지 포기했지만, 마세라티의 재정난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오르시는 1969년 마세라티의 경영권을 프랑스 시트로엥에 넘겼다.

당시 시트로엥은 SM프로젝트에 대한 엔진개발 업체를 찾고 있었는데, 마세라티 인수를 통해 이 같은 고민을 한번에 해결했다. 프랑스 최고의 스포츠카 업체인 시트로엥의 심장(엔진)에 마세라티의 유전자가 섞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러나 마세라티의 고난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 석유파동 이후 고급 자동차의 판매가 부진해지면서 시트로엥의 SM 역시 판매에 애를 먹었기 때문이다.

결국 시트로엥은 마세라티를 매각하기로 결심, 시장에 인수합병 매물로 내놓기에 이른다. 하지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자, 1975년 5월 모데나 공장이 자발적인 파산을 선언한다고 발표했다.

이 파산선언은 사실 관심을 끌기 위한 일종의 액션이었다. 하지만 시트로엥의 ‘파산’ 강공책에 알레한드로 드 토마소(Alejandro de Tomaso)와 이탈리아 정부기관인 GEPI는 마세라티의 지분을 인수, 주요주주가 됐다. 드 토마소가 공장운영을 맡았다. 오르시의 아들 오머 오르시가 이사로 합류했으나, 곧 사임했다.

1970년대 극심한 판매부진을 겪었던 마세라티는 1982년 이후 흑자를 기록, 빛을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대량 생산되는 스포츠카들에 밀리면서 암울한 전망이 다시 재기됐다.

- 페라리 계열 마세라티, 성장 액셀 밟으며 질주 중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마세라티의 진가는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1993년 드 토마소가 지병으로 인해 지분 51%를 피아트그룹에 매각하면서 피아트그룹의 가족이 된 마세라티는 당시의 구식모델을 현재에 맞게 개선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등장한 첫 모델이 바로 ‘바이터보’다. ‘기블리(Ghibli)’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이 차량은 내부는 대부분 그대로 유지했지만, 외관과 품질은 모두 환골탈태를 겪었다. 뒤이어 ‘콰트로포르테(Quattroporte)’가 출시되면서 마세라티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피아트는 1997년 마세라티를 계열사 중 하나인 페라리에 매각한다. 페라리는 피아트그룹 산하이지만, 독자적인 경영을 하고 있다.

페라리의 식구가 된 마세라티는 2007년 슈퍼카 시장에 돌풍을 일으킨 ‘그란투리스모’를 출시, 세계 자동차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피닌파리바가 디자인한 그란투리스모는 첫 위용을 드러낸 제네바모터쇼에서 “슈퍼카의 명품”이란 찬사를 받았다.

마세라티는 현재 성장을 위한 급가속을 하고 있다. 2006년 5,734대에서 7,496대, 그리고 2008년에는 8,586대가 판매되었다. 2년 만에 3,000대 가까이 증가해 사상 최고 판매량을 기록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세계 유수의 슈퍼카들과 견주어도 밀리지 않은 고성능을 자랑함에도, 재정난과 수작업을 고수하는 고집스러움이 마세라티를 어렵게 했다”며 “하지만 이런 고집스러움이 마세라티 만의 스타일을 구축해 이제는 슈퍼카 중 가장 매력적인 브랜드로 떠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snikers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