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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story

[Volkswagen] ‘대중의 발’에서 럭셔리 메이커로 변신한


'폭스바겐은 대중차?'
서민적인 독일의 국민차로만 알려져 있던 폭스바겐은 사실 서민적이지 않다. 오히려 최근의 경향만을 놓고 본다면 럭셔리 브랜드에 가깝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폭스바겐’이라는 서민형 브랜드가 있기는 하지만, 그룹 휘하에 벤틀리, 람보르기니, 아우디 등 최고급 브랜드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이런 폭스바겐이 최근 세계 자동차업계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스포츠카의 대명사로 불리는 포르쉐와의 합병을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합병이 성사될 경우 폭스바겐은 스포츠카 시장의 절대강자인 포르쉐를 모기업으로, 가장 서민적인 브랜드인 폭스바겐과 럭셔리 브랜드들을 계열사로 두게 되는 세계 최대의 자동차 메이커로 다시한번 거듭나게 된다. 이 때문에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들은 이번 폭스바겐과 포르쉐의 합병 추진에 민감한 반응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상황을 고려하면 합병은 그리 녹녹치 않아 보인다. 폭스바겐의 주요주주인 독일 작센정부(폭스바겐 지분 20.01% 보유)가 포르쉐와의 결혼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독일의 딱정벌레는 포르쉐엔진을 달고 럭셔리 메이커로의 탈피에 성공할 수 있을까.

- 히틀러의 지시로 탄생한 독일의 국민차

독일의 국민차 ‘폭스바겐’은 아이러니하게도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이었던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설립됐다. 1937년 5월 히틀러가 세운 ‘독일국민차 준비회사’가 전신이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다음해 9월 폭스바겐 유한회사로 개칭했다. 회사 이름인 폭스바겐은 독일어로 ‘국민차’를 의미한다.
히틀러는 폭스바겐을 설립하기 전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자동차공학자인 ‘페르디난트 포르쉐(Feridnand Porsche)’ 박사에게 자동차 생산을 주문한다. 당시 히틀러는 “공랭식으로 기름 1리터로 10km이상을 갈 수 있어야 하며, 5인 가족이 탑승 가능한 것은 물론, 속도는 100km/h를 넘어야 한다”는 조건을 단 것으로 알려졌다.
포르쉐 박사는 히틀러의 이런 계획에 매료돼 자동차 연구에 매진한 결과, 1936년 10월 국민차의 원형을 발표한다. 바로 독일 자동차업계의 자존심인 ‘비틀’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폭스바겐 역시 전쟁의 불길을 피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폭스바겐의 공장이 있던 작센주 볼프스부르크의 공장은 파괴된 것이다. 이후 1945년 다시 생산을 재개한 폭스바겐은 59년 대대적인 광고에 나서면서 다시 위상을 되찾았다. 1969년에는 아우디NSU아우토유니온을 인수하면서 프리미엄 메이커도 휘하에 두게 됐다.
그러나 폭스바겐의 명성은 여전히 비틀을 통해 지속됐다. 비틀은 36년 원형 생산 이후 여러차례 개량형을 출시하면서 생산을 지속했으나 1978년 1월 결국 1,927만대를 끝으로 생산을 중단하게 된다. 2,000만대 가까운 판매기록을 세웠던 만큼 후속차종으로 여러 차종이 거론됐으나 비틀의 후속으로는 74년 ‘래빗’으로 결정됐다.
폭스바겐이 유럽 최대의 자동차메이커로 올라서게 된 것은 1990년 체코 자동차메이커인 ‘스코다(Skoda)’를 인수하게 되면서부터다. 연간 평균 생산대수 520만대(독일 180만대, 기타 340만대)를 자랑하는 폭스바겐은 고용규모만 30만명(독일 15만명, 기타 15만명)에 이르며, 본사는 공장이 있던 볼프스부르크에 있다.

- 외손자 '피에히'의 거침없는 질주

폭스바겐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들은 바로 포르쉐 가문이다. 폭스바겐 비틀을 만든 창업자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에 이어 그의 외손자인 ‘피에히(Ferdinand Piech)’가 현재 그룹의 경영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2002년 폭스바겐AG 회장에서 물러난 그는 현재 그룹 감사회 회장과 이사를 역임하고 있으며 임기는 2012년까지다.
피에히는 1937년 4월 스위스 빈에서 포르쉐의 딸인 루이제와 변호사 안톤 피에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부터 외조부를 통해 포르쉐의 발전을 지켜봤으며, 스위스에서 학교를 졸업한 후 1958년 포르쉐에서 실습생으로 일했다. 이후 62년 F1엔진에 관한 논문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다음해에 포르쉐에 정식으로 입사했다.
외조부의 회사에서 스포츠카 엔진 개발 업무를 담당하게 된 그는 포르쉐가 자랑하는 911을 만들어낸 장본인들 중 하나다. 911는 포르쉐 박사의 손자인 알렉산더 포르쉐가 디자인을, 피에히는 911의 엔진개발을 담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뛰어난 업무실적을 바탕으로 초고속 승진을 한 피에히는 71년 기술부분 총책임자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역대 포르쉐 라인업 중에서 가장 유명한 917을 탄생시킨 것. 이를 통해 피에히는 포르쉐를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스포츠카 메이커로 도약시킨다.
그러나 피에히에게도 시련의 시기가 찾아온다. 917을 탄생시킨 그해 말 기업의 족벌경영 폐해를 막기 위한 규제가 생기면서 결국 포르쉐를 떠나게 된 것.
외조부의 회사에서 나오게 된 그는 다임러벤츠의 기술고문을 거쳐, 이듬해인 72년 아우디의 중역으로 다시 현장에 복귀한다.
아우디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피에히는 개발담당 이사를 맡으면서 아우디의 자존심인 ‘콰트로시스템’을 개발한다. 이후 83년 아우디 부회장으로 승진한 그는 88년 다시 회장직에 취임하면서 폭스바겐에 가려져 있던 아우디를 독자브랜드로 성장시켰다.
계열사에 불과하던 아우디를 프리미엄 브랜드로 탈바꿈시킨 피에히는 이후 모기업인 폭스바겐AG의 회장직으로 영전하면서 거침없는 질주를 시작한다. 생산비 절감을 통해 적자운영 개선에 나서는가 하면, 뉴비틀과 같은 폭스바겐의 고유모델을 리뉴얼하면서 다시 폭스바겐의 중흥시대를 열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폭스바겐은 최고급 럭셔리 브랜드인 벤틀리·람보르기니·부가티 등은 물론, 세아트·스카니아·만을 인수하면서 유럽 최대 자동차 메이커로의 입지를 다졌다.

- 포르쉐에 인수된 폭스바겐의 앞날은?

그러나 피에히의 질주는 결국 폭스바겐에 짙은 스키드마크(타이어자국)를 남겼다. 2000년 이후 고급화전략으로 인해 대중차의 상징이던 폭스바겐이 대형화·고급화되면서 생산원가가 상승, 매출에 악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미시장 진출의 선봉장으로 기대를 걸었던 페이튼과 WB엔진이 참패하면서 결국 폭스바겐그룹은 그를 사령탑에서 물러나게 했다.
결국 피에히는 사촌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사촌의 구조요청을 받은 포르쉐그룹은 곧바로 대규모 자금지원에 나선다. 이후 이 자금은 폭스바겐의 주식으로 전환되면서 포르쉐는 폭스바겐의 최대주주로 등극한다. 외손자가 회장으로 있는 회사가 할아버지의 친가쪽 손자에 회사를 넘기는 모습이 연출된 셈이다.
29일 현재 폭스바겐은 사실상 포르쉐그룹의 계열사로 등록돼 있다. 포르쉐는 폭스바겐의 지분 50% 이상을 확보했으며, 계속 늘려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포르쉐그룹 측은 “폭스바겐을 독자적인 브랜드를 갖춘 독립적인 자회사로 운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피에히가 자신의 가문을 위해 폭스바겐을 팔아치웠다는 주장도 있다. 포르쉐그룹의 최대주주가 바로 외가쪽인 피에히와 친가쪽인 알렉산더 포르쉐이기 때문이다. 결국 폭스바겐→포르쉐→포르쉐가문(피에히)로 이어지는 구조다.
그러나 독일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폭스바겐은 세간의 예측처럼 쉽사리 포르쉐그룹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20.03%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독일 작센정부가 여전히 포르쉐그룹으로의 편입을 반대하고 있어서다.
작센 주정부의 ‘폭스바겐법’에 따르면 지분 20% 이상을 보유한 주주가 거부권을 행사하면 나머지 지분을 갖고 있어도 경영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규정돼 있다. 결국 폭스바겐은 포르쉐그룹의 우산 아래 있어도 독일의 국민차라는 이미지로 계속 남게 될 것이란게 자동차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snikerse@media.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