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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story

[Ferarri] 바람의 역사, 세계 남성들의 꿈이 되다!


바람을 가르는 빨간색 스포츠카!
남성이라면 한번쯤은 꿈꿔봤을 광경이다. 이 빨간색 스포츠카에 어울리는 자동차메이커는 무엇일까. 열이면 열, 모두 이탈리아산 종마 ‘페라리’라고 말할 것이다.
페라리는 사실 자동차라고 하기에는 무엇인가 부족하다. 이 빨간색 종마를 보고 있노라면 질주본능이 끓어오르기 때문이다.
달리고 싶은 욕망의 대명사. 바람의 역사로 불리는 ‘페라리’의 과거를 되짚어봤다.


페라리, 자동차레이스에 인생을 걸다!

페라리는 평생을 달리고 싶던 한 사나이의 열정으로 세상에 태어났다. 바로 페라리의 창업주 ‘엔초 페라리’가 그 주인공이다.
1898년 이탈리아의 모데나 외곽의 철공소 아들로 태어난 엔초는 어린시절 카레이스에 매료된다. 철공소를 하던 아버지는 이후 자동차 정비소를 세웠고, 엔초는 그곳에서 13살의 어린 나이에 핸들을 잡기 시작했다.
레이싱을 좋아했던 이탈리아의 이 청년은 그러나 아버지와 형의 죽음으로 홀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소년가장이 된다. 18살이 되어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엔초는 가족의 생계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피아트(Fiat)사에 지원했지만 낙방했고, 결국 토리노의 국립 기계제작소의 시험운전사로 초라하게 청년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레이스의 천재였던 엔초의 재능은 곧 발견되게 된다. 21살에 ‘파르마 베르세토’ 레이스에 참가해 2위를 하면서 당시 최고의 레이싱팀 중 하나였던 ‘알파로메오’에 입단하게 된 것. 이어 그는 이듬해인 1924년 코파이체르보 레이스에 참가해, 최고의 명성의 명성을 자랑하던 독일의 메르세데스벤츠팀을 격파하면서 이탈리아 최고의 레이서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영광도 잠시. 자신을 받아들여줬던 알파로메오가 레이싱에 직접 참가하면서 엔초페라리는 팀을 해체하게 되고 낙향을 하게 된다.
고향에 돌아온 엔초는 1940년 Auto Avio Costruzione(자동차 및 항공 제작회사)라는 공장을 건립하였고 본격적으로 스포츠카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최초로 생산된 차량은 1.5리터 엔진의 '815(Vettura 815)'였으나 엔진결함으로 대회에서 완주조차 못했고, 그나마 있던 공장마저 1차대전으로 인해 폭파당하면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엔초는 1947년 Ferrari의 이름으로 제작된 첫 모델인 125S를 내놓았고, 이듬해 Ferrari 166까지 선보였다. 이어 1951년에는 영국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면서 스포츠카 메이커로서의 명성을 쌓아가게 된다.

아들의 죽음 이후, 최고의 스포츠카로 거듭나다!

세계 1·2차대전과 공장이 폭격을 당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레이싱에 대한 열정만으로 자동차를 계속 만들던 엔초에게 이번에는 엄청난 불행이 찾아온다.
1956년 아들인 ‘알프레도’가 사망한 것은 물론, 가정불화로 이혼의 아픔까지 겪은 것.
엔초는 당시의 아픔을 가슴 깊숙이 숨기고 공장에서 지내며 더욱 자동차에 매진했다. 이후 페라리에서 생산되는 모든 차량에는 엔초의 아들인 ‘알프레도’의 별명이 ‘디노’를 붙였다.
화려한 레이싱 우승과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자동차 디자이너 피닌파리나와의 인연으로 명성을 쌓게 된 페라리의 인기를 그야말로 높아만 갔다. 결국 생산이 공급을 따라가지 못하게 된 페라리는 1969년 도움을 요청했고, 페라리의 지분 50%를 매각했다.

피아트와 손을 잡은 뒤 전성기를 맞이한 페라리는 타지오·알베르토·후안 등의 명레이서들과 함께 각종 레이싱 대회를 석권, 1947년~1988년까지 우승 5,000회 이상, 20개의 세계타이틀 획득이라는 자동차경주 역사상 전무후무한 팀으로 기록됐다.
이후 엔초는 90세가 되던 1988년 고향인 모데나에서 숨을 거뒀으며, 페라리는 90%의 지분을 추가로 피아트에 넘기면서 계열사로 편입됐다. 하지만 페라리의 놀라운 기술력 때문에 피아트와는 별도의 법인으로 운영되고 있다.


질주본능 엠블럼과 ‘억’ 소리나는 차량가격

페라리의 상징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바로 엠블럼이다. 앞발을 든 채로 질주를 준비하고 있는 듯한 역동적인 말 모양의 엠블럼은 금방이라도 굉음을 내며 앞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페라리의 질주본능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 엠블럼은 사실 세계1차대전 당시 이탈리아 최고의 파일럿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하지만 페라리의 레이스 모습을 지켜본 파일럿의 부모가 “마치 질주하는 모습이 전투기 같다”며 이 엠블럼을 사용하도록 허가했고, 엔초는 이 엠블럼을 자동차에 새김으로서 자연스레 페라리사의 상징이 됐다.
엄청난 경매가격 역시 페라리의 가치를 잘 나타내주는 특징 중 하나다. 기본이 ‘억’단위로, 최근 모델보다 과거에 나왔던 구형모델들의 가격이 더욱 비싸다.
페라리의 가격이 이처럼 비싼 이유는 바로 레이싱이 가능한 수제제작 차량들이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하루 몇백대씩 찍어내는 차량이 아닌 한 모델당 최대 100대를 넘지 않고, 적게 생산한 경우에는 40여대 정도에 그친 것도 있어 희소성이 엄청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실제 설립자인 엔초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엔초페라리의 경우 가격이 한화로 25~35억원선에 이르지만, 1957~58년 사이에 만들어진 페라리 250테스타로사의 가격은 350억원대로 예상되고 있다.
테스타로사는 현재 22대만 남아있는 휘귀 차량으로 엔진의 실린더가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어 테스타로사(붉은 머리)란 이름을 갖게 됐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들은 페라리에 대해 “두말할 나위 없는 스포츠카의 지존”이라며 “바람을 따라 흐르는 듯한 차체의 곡선에 극한의 속도를 가능케 해주는 엔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운전석에 앉아 차분하게 즐길 수 있도록 설계한 놀라운 기술이 페라리를 ‘슈퍼카’가 아닌 ‘드림카’로 여전히 여겨지게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끝>
snikers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