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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story

[Lamborgini] 농부가 만든 황소 슈퍼카…페라리의 아성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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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스포츠카!’
세계 최고라는 칭송을 받은 스포츠카는 과연 어떤 차일까. 정답은 여러 개다. 시대에 따라 슈퍼카 대접을 받은 차량들이 달랐기 때문이다. 50~60년대에 페라리가 슈퍼카의 전설이었다면, 70~80년대에는 미국 머슬카들의 전성기였다는 업계의 일반적인 평가다.
그러나 최근 들어 유독 돋보이는 슈퍼카 브랜드가 있다. 바로 페라리의 강적 ‘람보르기니’다. 이 업체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슈퍼카 브랜드 3인방(페라리·마세라티·람보르기니) 중 하나지만 역사가 가장 짧다. 게다가 자동차 전문기업도 아니다.(람보르기니의 모회사는 트랙터 회사다)
그럼에도 람보르기니는 세계 최고의 스포츠카란 명성을 듣고 있다. ‘발끈 창업’으로도 잘 알려진 페루치오 람보르기니의 자동차인생을 되돌아봤다.


- 농부의 아들, 伊 최대의 트렉터 회사를 세우다

이탈리아 에밀리아 지방의 공업도시 블로냐에서 북쪽으로 25km 떨어진 시골마을 레나조 데 센토. 람보르기니의 창업자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1916년 4월28일 이곳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흙을 발에 묻히고 자라난 페루치오는 당시 이탈리아 일대에 불고 있던 자동차열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소년 시절에 이미 주조장치를 갖춘 기계샵을 열 정도로 기계제작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페루치오는 이후 볼로냐 공대에 들어가면서 공학학위를 따며 본격적인 기술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차대전이 발발한 이후에도 페루치오는 기계공의 길을 이어갔다. 공군에 입대해 자동차와 기계를 수리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뒤 페루치오는 30살의 나이로 고향에 돌아왔다. 당시 이탈리아 농촌은 농지가 전쟁으로 황폐화돼서 이를 개간할 트랙터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를 파악하고 있던 페루치오는 폐기처분돼 버려진 영국 육군의 장갑트럭을 트랙터로 개조해 판매하게 된다.
폐기된 트럭을 개조해 트랙터를 생산한 페루치오는 49년에 트랙터 개조공장을 열고 본격적인 농기계 회사를 차리게 된다. 이후 람보르기니 트락토리체(페루치오가 세운 트랙터 회사)는 이탈리아 최대의 트랙터 메이커가 됐고, 페루치오는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게 됐다.
페루치오는 이후 에어컨 사업 등 하는 일마다 성공하면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산업인이자 재벌로 변신한다. 특히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두 개의 훈장을 받았으며, 대통령한테서는 ‘노동기사’ 직위에 임명되기도 했다.


- 페라리의 모욕에 ‘발끈’, 스포츠카 제작 나서

트랙터 재벌로 불리며 평탄한 삶을 살아가던 페루치오는 1963년 ‘람보르기니’란 스포츠카제작회사를 설립, 자동차업계에 뛰어든다.
스포츠카 제작사 창업과정은 ‘발끈 창업 스토리’로도 유명하다. 업계에 따르면 페루치오는 페라리의 창업자인 엔초에게 모욕을 당해 람보르기니를 설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50~60년대 이탈리아에서는 모터스포츠가 유행하면서 엔초 페라리의 ‘페라리’가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페루치오 역시 페라리를 몇 대 갖고 있었는데, 이중 한 대가 ‘클러치 고장(기어박스 오류라는 설도 있음)’으로 인해 수리를 맡기는 과정에서 엔초와의 면담을 요구했다.
페루치오는 이와 관련 “당시 페라리는 최고의 스포츠카였지만, 기술적인 면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서 “이에 대한 해결을 위해 엔초와의 면담을 요청했지만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고 한 언론을 통해 회고했다.
일설에 따르면 엔초는 ‘당신은 트랙터에 매달려라. 나는 스포츠카 제작에 관심을 가질 뿐이다’며 페루치오를 무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엔초의 무시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페루치오가 ‘타도 페라리’를 위해 람보르기니를 설립했다는 것.
하지만 페루치오가 람보르기니를 설립하게 된 배경에 대해 “페라리를 뛰어넘는 차를 만들겠다”는 다짐이 작용했다는 게 업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편 람보르기니 창업과 관련 ‘황소’ 엠블럼 역시 여러 가지 설들이 나돌고 있다. 페루치오가 가문의 상징이었던 황소를 엠블럼에 썼다는 내용인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람보르기니의 상징이 황소가 된 것은 바로 페루치오의 별자리가 ‘황소’였기 때문이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페루치오는 1963년 결국 자신의 생각대로 람보르기니를 설립한다. 그리고 350GTV를 시작으로 페라리를 뛰어넘는 슈퍼카의 명문으로 자리매김을 시작했다.

- 350GT 출시로 ‘페라리’ 뛰어넘다!

페루치오는 람보르기니의 공장을 고향인 센토와 모데나 중간에 있는 볼로냐 교외에 건립했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자동차전문가들을 스카우트했다. 그리고 그는 경영자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당시 람보르기니 창업과정에 참여한 이들로는 ▲알파로메오를 거쳐 페라리의 엔지니어로 있었던 지오트 비자니리 ▲페라리에서 시작해 마세라티에서 근무하던 장파올로 달라라 ▲마세라티의 엔지니어였던 25세의 파올로 스탄자니 ▲뉴질랜드 출신의 레이싱미캐닉 겸 드라이버였던 보브 월레스 등이 있다.


페루치오가 그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재료와 시간, 환경을 제공해고 단 한가지를 요구했다. ‘페라리보다 더 뛰어난 스포츠카’를 만들어달라고 한 것.
그렇게 탄생한 차량이 바로 1964년 제네바 오토살롱에 출품되면서 당시 가장 빠른 차로 공식인증됐던 ‘350GT’다.

350GT는 페라리처럼 12기통이지만 페라리보다 도 높은 배기량을 가졌다.(페라리 3300cc / 람보르기니 3500cc) 엔진방식도 SOHC가 아닌 DOHC방식을 적용했으며, 4단기어였던 페라리에 높은 5단을 적용했다. 이렇게 탄생한 350GT는 페라리의 그 어떤 차보다 조용했고, 빨랐으며, 세련된 디자인으로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 전설의 명차 ‘카운테크’ 출시 앞두고 은퇴

람보르기니는 이후 68년 이슬레로(Islero)·미우라(Miura)·에스파다(Espada)를 70년에는 자라마(Jarama)를 선보인다.
이중 람보르기니의 대표차량으로 손꼽히는 미우라는 2인승 미드십으로 스포츠카 업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이 차량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V12엔진을 등 뒤에 옆으로 놓은 것인데, 이는 짧은 훨베이스(동체)와 승객을 위한 공간을 모두 만족시켰다.
다른 스포츠카 제작사들 역시 이런 방식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이를 차량에 적용하지는 못했다. 이 방식을 적용하면 기어 링키지가 복잡하게 되면서 차량 제작이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람보르기니는 엔진 섬프를 꿰뚫음으로서 뒷부분의 트랜스미션에 연결해 해결했다.


이 방식은 당시 슈퍼카를 제작하던 란치아, 피아트 뿐만 아니라 경쟁자였던 페라리마저 미드십 방식을 도입하게 된 배경으로 작용했다.
사실상 페라리가 람보르기니의 기술을 흉내 내자 페루치오는 사업을 정리하고 운브리아 지방의 농장으로 돌아간다. 농부의 아들답게 삶의 목적지를 흙으로 정한 것.
하지만 이후에도 람보르기니는 1970년 전설의 명차 ‘카운테크’를 출시하며 페라리를 뛰어넘는 슈퍼카의 명성을 이어갔다.


- 주인 여러번 바뀌다 결국 아우디 산하에 안착

페루치오 이후 람보르기니는 30년 가까이 부침을 겪게 된다. 70년 카운테크 출시 이후 최고의 명성을 구가하던 람보르기니를 페루치오가 팔아치웠기 때문이다. 람보르기니는 73년 스위스의 사업가 헨리 로세띠와 르네 라이머를 새주인으로 맞게 된다.
그러나 결국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1977년 람보르기니는 파산한다. 이에 패트릭 밈람이 87년까지 비상경영체제를 유지하며 회사를 이어간다.


이 기간 동안 람보르기니는 사실상 새로운 차량을 선보이지 못했다. 잘파와 LM 등을 선보이긴 했으니, 잘 알려지지 않았고, 특히 LM은 스포츠카 업체와는 어울리지 않는 4륜구동 SUV로 람보르기니의 슈퍼카 역사에 숨겨진 차량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1987년 크라이슬러에 인수되면서 람보르기니는 다시 전성기를 맞게 된다. 람보르기니의 대표적 차량인 디아블로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 차량은 곡선 위주였던 페라리와 달리 날카로운 직선으로 이뤄져 있어 상당한 호응을 받았다.

이후 메가텍 마이콤 등을 거친 람보르기니는 1998년 폭스바겐그룹 산하 아우디AG에 인수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아우디의 식구가 된 람보르기니는 최근까지 무르시엘라고와 가야르도 등을 출시한데 이어 지난해에는 레벤톤을 선보이며 슈퍼카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snikerse@gmail.com